#17 누구나 영화 속 주인공을 꿈꾸지만, - NYC, USA 여행_J o u r n e y



문득 예상치 못한 곳에서 기억의 파도가 밀려올 때가 있다. 계획되지 않은 여행기지만 갑자기, 문득, 나도모르게 기억에서 되살아난 한 이야기가 있어 끄적여 본다. 요즘 한참 영화 '비포 미드나잇'이 개봉하여 오랜만에 영화관을 찾은 이후 한동안 비포쓰리즈에 중독되어 전편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을 찾아보았다. 참 아름다운 이야기. 특히나 1995년 개봉한 첫번째 영화 "비포 선라이즈"는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나는 젊은 이들에게 워너비 같은 이야기이다. 여행의 설레임과 함께 누군가를_그것도 잘생기고 멋진_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 혹은 허튼 꿈에 부풀어 여행을 더욱 부추기게 하는 것. 여행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요소 중 하나. 
 
"정말 영화 같은 이야기다."

하며 감탄하다가 문득 나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아주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지만.

*


 
2008년 8월

나는 뉴욕에 있었다. 여름 계절학기 교환학생을 마치고 뉴욕 근처에 있는 한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당시는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에 열중해 있던 터라 그 선생님께도 조언을 얻기위해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에 그녀의 책 뒷장에 써있는 이메일 주소에 편지를 보내 만나주십사 하는 메일을 보냈다. 1년 중 반은 연주여행을 떠나시는 분이었기에 스케줄이 맞을지도 걱정이었다. 흔쾌히도 만나주신다는 답메일을 받고 얼마나 가슴 벅찼는지 모른다. 내가 뉴욕에서 세운 계획 중에 가장 중요한 계획이었다.

뉴욕 중앙역, 주말에 친구들과 롱비치에 가기 위해 기차를 타본 적이 있으나 혼자 기차를 타는 것은 처음이었다. 약 1시간 정도 떨어진 외곽이었는데 내가 잘 찾아가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를 만날 부푼 가슴에 두려움 걱정 따위는 없었다. 무인 발권기로 티켓을 끊고 플랫폼으로 무작정 들어갔다. 그러나 줄줄이 세워진 똑같은 기차모양에 내가 탈 기차가 맞는지 무척 헷갈렸다.

'물어봐야겠다.'

두리번 두리번 거리다 저 멀리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갈색 곱슬머리에 평범하고도 캐주얼한 차림, 배우 누구를 닮았지만 그닥 잘생기게 닮진 않은 평범한 얼굴의 백인남자, 분명 미국인일 거다. 기차에 대해 잘 알겠지?

내가 가야할 행선지 이름을 대며 그 곳 가는 기차가 맞냐고 묻자 그는 쭈볏쭈볏 아마 맞을 거라고 답했던 것 같다. 그럼 당연히 맞겠지 싶어 기차 안으로 씩씩하게 들어갔다. 기차는 정해진 좌석은 없는 기차였다. 세 좌석씩 한 줄에 복도를 사이에 두고 여섯자리 있는 기차였다. 나는 오른쪽 창가에 자리를 잡고 짐을 풀어 편하게 앉았다.

"한시간....."

잘못 내리면 돌이킬 수 없을 터였다. 정신 바짝 차려야지 마음 먹으며 기차 이곳 저곳을 두리번 거리고 있는데, 아까 내가 길을 물었던 그 미국인 남자가 우리 칸으로 들어와 내 대각선 앞에 앉았다. 반가운 마음에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두리번두리번, 마침내 기차는 출발 했고 복잡하던 맨하튼 시내를 빠져나와 순식간에 외곽으로 진입했다. 나는 디카를 꺼내 그 동안의 사진정리도 하고 셀카를 찍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뉴욕에 오면서 산 디지탈카메라, 나에게 두번째쯤 되는 디지탈카메라였다. 코닥, 필름사에서 나온 카메라 답게 가격대비 파란색 색감에 아주 끝내주게 나오는 카메라였다. 뉴욕에서 하도 혼자 사진을 찍어서 그런지 셀카의 달인이 되어 있었다. 왼손을 있는대로 쭉 뻗고 오른손으로는 브이를 그려가며 열심히 셀카를 찍고 있는데, 아까 그 남자가 말을 걸어 왔다. 기억에 '내가 찍어줄까?' 했던 것 같다. 그래 나도 안다. 셀카 찍는 모습이 얼마나 웃긴지.. 그래도 셀카가 잘 나온단 말이다. 무심하게 됐다- 아니 '괜찮다'고 말했다. 순간 그가 무안해 하기에 미안한 마음이 든 나는 바로 내가 찍은 사진 보여줄까? 하고 물었다. 그는 활짝 웃으며 아예 자기 가방을 갖고 와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은근히 나의 새 카메라로 찍은 나의 걸작들을 자랑하고 싶었다. 사진을 보며 낄낄대다가 어느 정도 다 보자 서로 할말도 없고 해서...나는 마침 하던 일정정리를 수첩에 하기 시작했다. 남은 2주 동안 어떻게 지낼지 구상도 하고, 선생님을 만나면 어떤 것을 여쭈어야 할지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옆자리를 보았는데 어느새 미국인 그 남자는 자기자리로 돌아가 앉아있었다. 그는 가방을 열어 뒤적뒤적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무얼 찾고 있는 거지?'

가방에 머리를 박고는 있는 것 없는 것 다 꺼내보더니 지갑에서 손바닥 두 개를 합친 것 만한 메모지를 하나 꺼내 들었다. 다시 가방 이곳 저곳을 뒤지다 포기한 듯 다시 그 메모지를 꺼내 들었다. 메모지가 필요한 건가? 내 노트 한장 찢어줄까? 하다가 이내 그만 두었다. 괜히 관여하면 안될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하던 일을 계속했다. 조금 뒤에 그가 궁금하여 슬쩍 바라보니 후훗... 아까 그 메모지를 정말 조심스럽게 접어 재단하고 있었다. 내 짐작에 아마도 글씨가 써져 있는 부분을 잘라내고 새로 메모를 할 심산이었다. 그 모습이 사뭇 진지해서 우리 수업시간 내내 입버릇처럼 'exactly'를 외치던 미술선생 크리스가 생각이 났다. 이런 캐릭터 은근 많구나 하면서.

그는 이제 펜으로 심혈을 기울여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메모지를 가로 세로로 접고는 박박 찢기 시작했다. 으으.. 괴로운 듯 그는 갈색 윤기나는 곱슬머리를 쥐어 띁으며 세상 모든 걱정을 다 떠안은 듯 고뇌하기 시작한다. 헛... 뭐지? 그는 한숨을 크게 쉬고는 다시 찢어버린 메모지를 정성스럽게 펴서 테이블에 퍼즐 놀이하듯 이어 붙인 뒤 다시 머리칼을 쥐어 띁는다. 그리고는 다시 찢긴 메모지의 한귀퉁이를 정성스레 재단하기 시작한다. 참.. 캐릭터 특이하군. 생긴건 멀쩡한데 완전 얼간이 캐릭터야 쯔쯧..

그리고는 그가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난 여기까지 보고-얼간이라 단정짓고는- 다시 내 할일에 몰두했던 것 같다. 초행자에게 한 시간은 꽤 길다. 그래도 놓치지 않고 내려야 할 역을 잘 찾은 나는 나 스스로 뿌듯해 하며 기차에서 내렸다.  길다란 플랫폼 저 멀리서 내가 뵈어야 할 선생님이 서 있었다. 나는 그녀를 단번에 알아보았고, 그녀 역시 나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동양인 여자아이는 나 혼자 내렸으니 알아보는게 당연할지 모르겠지만, 처음 뵈었는데 그녀는 나의 큰어머니 같이 익숙하고도 반가웠다. 

"선생님!!"
 
사람들 숲을 헤치며 달려가고 있는 그 순간, 누군가가 나의 팔을 붙잡았다.
그였다. 내가 길을 물어본, 기차 안에서 킥킥대며 사진을 구경한, 메모지를 북북 찢던 그 얼간이.

"뭐지? 이 사람이 왜 여기서 내렸지?"

그는 내게 무언가를 건내 주었다. 고이 접은 쪽지였다. 아주 조그만 크기의.
선생님이 걱정스러운 듯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자 나는 퍼뜩 정신이 들어 그에게 짧은 눈인사를 하고는 빠져나왔다. 쪽지는 청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은 채.

"아는 사람이니?"
"아니요"

 나는 선생님의 댁으로 가서 그녀가 만들어 준 음식을 먹으며 담소도 나누고, 같이 연주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 같다. 내가 묻고 싶었던 여러가지에 대해서도 현실적인 답변을 들은 것 같다. 역시 오길 잘했다면서.. 그리고 그날 저녁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문득 그가 내게 준 쪽지가 생각나 펴 보았다. 손바닥 반 크기도 안되는 조그만 종이에 깨알같이 적은 그의 이메일 주소가 눈에 들어왔다.

"이걸 주려고 그 얼간이 짓을 한거야? 훗.."

그 이후로는.. 실은 까맣게 잊고 있다가 뒤늦게 그 쪽지를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그날 입은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꺼내어지지 않은 채로 세탁기에 들어가 분해된 것으로 추정할 수밖에.

 


*


누구나 영화 속 상황을 꿈꾸지만, 영화의 러브스토리를 현실에서 완성시키기엔 참으로 여러가지 조건이 있는 것 같다. 일단은 서로가 누군가가 마음에 들어올 만한 여유가 있어야 하고, 상대의 행동이 멋있거나, 혹은 매력적으로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비포 선라이즈'처럼 두 주인공이 지독한 수다쟁이이거나. 
 두 주인공이 서로 스파크가 튀어 하나의 러브스토리가 된다는 것, 연인이란 관계로 발전했다는 것은 영화가 아니더라도 정말 대단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여행에서는 일상보다는 그런 상황에 조금 더 과감해 질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영화 속 상황, 곱씹어보면 어쩌면 실제 일어날수 있는 일들이기도 하고. 그러나 그 이야기를 어떻게 꾸려 가는지, 그리고 이야기의 결말은 두 주인공의 몫.  



@NYC, USA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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